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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마녀, 헤티 그린: 성차별을 딛고 미국을 구한 여성의 이야기

핑크어흥 2025. 10. 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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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이, 마녀가 되다

그녀는 ‘마녀’였다. 칠흑같이 검은 옷만 고수하고, 얼굴엔 표정이 없어서였다. 얼음장 같은 집엔 좀처럼 온기가 돌지 않았다. 식어 빠진 파이나 빵 조각 따위로 배를 채운다. 어둑한 집에서는 아픈 아이들이 병원을 가지 못한다. 지독한 구두쇠였던 그녀가 돈이 든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한 아이는 다리가 잘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남자들은 언제나 능력 있는 여자를 시샘하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묘사한 마녀. 1886년 작품. 그녀는 미국이 알아주는 부자였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다

헤티 하울랜드(결혼 전 성)는 사실상 버려진 아이였다. 1834년 매사추세츠의 부유한 고래잡이 업자로 이름난 하울랜드 가문에서 원하는 건 아들이었다. 성염색체가 XX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헤티는 축복받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그녀도 사람 대접을 받는 듯했다. 온 집안이 반기던 남동생은 그러나 얼마 못 가 죽어버렸다. 엄마는 몸져누웠고, 아빠는 헤티에게 더 이상 미소 짓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헤티 그린은 할아버지 댁으로 보내졌다. 자라나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부모’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점에서, 헤티 그린의 삶은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포경선 집안에서 딸이 태어났다네...” 1835년 묘사된 고래잡이.

 

 

 

 

월스트리트의 마녀, 헤티 그린의 투자 철학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부를 쌓았다. 국가가 그녀에게 재정 도움을 청했을 정도였다니. 부(富)가 거친 말(馬)의 성질을 가졌음을 잘 알고 있어서, 어디서나 돈의 고삐를 쥐었다. 꼭 필요한 데에만 돈을 쓰고, 쓸데없이 부를 과시하지 않았다. 개인적 생활에서나, 국가적 대의 앞에서나 같은 원칙이었다. 사치하지 않았고, 국가에 돈을 빌려줄 때도 과한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당대의 사람들은 돈 많은 여자를 낯설어하고 시기해 ‘월스트리트의 마녀’라고 불렀지만,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성녀의 것에 가까웠다.

 

 

 

 

결혼과 새로운 시작

헤티는 아버지의 사업을 돕다가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백만장자 사내를 만났다. 에드워드 H.그린이었다. 아시아에서 사업을 벌여 한 몫 크게 챙긴 백만장자. 아버지 에드워드는 그를 사윗감으로 눈독들였다. 헤티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약혼했다. 사업가 집안 간의 만남은 남다른 곳이 있어서, 두 에드워드는 계약서를 써서 결혼이 비즈니스의 연장임을 분명히 했다. “에드워드 H 그린이 헤티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린이 계약서에 사인하자, 헤티는 하울랜드란 성을 떼고 그린을 이름 뒤에 붙였다. 헤티가 그린이 되었던 그해, 아버지 에드워드가 죽었다. 헤티는 추스르고 싶어, 남편과 영국 런던으로 떠났다.

 

 

 

 

미국을 구한 영웅, 헤티 그린

전쟁은 파괴한 만큼 많은 것을 낳았다. 링컨 대통령은 남부 흑인 노예를 해방한 인물임과 동시에, 미국 최초로 불태환성 지폐를 발행한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지폐는 금·은과 교환되는 ‘증서’에 가까워서, 지폐를 들이대면 금·은을 내어줘야(태환) 했다. 지폐를 유통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의미였다. 링컨은 더 많은 돈이 필요해서 금·은에 묶인 지폐의 족쇄를 끊어버렸다. 미국 정부의 신뢰를 기반으로 지폐를 발행한 것이었다. 미국 최초 불태환(금·은으로 교환되지 않는) 지폐 ‘그린백’의 등장이었다. 링컨의 영광스러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린백’의 가치는 폭락하고 있었다. 상처받고 찢겨 헐떡이는 미국을 향한 의심이었다. 재정 우려는 미국 정부의 신뢰를 깎아 먹었다. 낮은 신뢰가 지폐의 가치를 훼손했다. 지폐의 가치가 낮아질수록, 헤티는 그 돈을 죄다 사들였다. 남들이 그린백을 두고 “쓰레기”라고 할 때, 그녀는 거기서 기회를 봤다. 앓아누운 미국에게서, 그녀는 부활할 미국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액면가의 절반에 거래되는 미국 지폐를 그녀는 기꺼이 품었다. 1875년 미국 의회가 ‘Specie Payment Resumption Act’를 통과시켰다. 지폐를 다시 금으로 전액 상환한다는 내용이었다. 금태환 제도로의 복귀였다. 미국 지폐는 다시 순식간에 제 가격을 회복했다. 헤티는 큰 부를 거머쥐었다. 1862년 처음 발행된 1달러 지폐 ‘그린백’.

 

 

 

 

헤티 그린, 시대를 앞서간 여성

1916년, 죽음을 앞둔 그녀의 재산은 1억 달러였다. 당시 미국 GDP의 0.1%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정치권에 줄을 대지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도 않은 순백의 돈. 때가 묻지도, 오염되지도 않은 몇 안 되는 달러. 눈을 감기 전 그녀는 딸 실비아에게 말했다. “여성도 경제관념을, 자신의 돈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시대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억압을 정면으로 거부한 ‘마녀’의 마지막 가르침. 혹은 성녀의 메시지.

 

 

 

 

헤티 그린, 시대를 초월한 여성 사업가의 삶

헤티 그린은 성차별과 사회적 편견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시대를 앞서간 여성 사업가였다. 그녀는 냉철한 투자 판단과 애국심으로 미국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으며,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강조하며 시대를 앞서갔다.

 

 

 

 

헤티 그린에 대한 궁금증 풀이

Q.헤티 그린은 왜 '월스트리트의 마녀'라고 불렸나요?

A.그녀는 검은 옷을 즐겨 입고, 사치하지 않는 절약하는 생활 습관을 가졌습니다. 또한, 남성 중심적인 금융계에서 냉철한 투자 판단을 내리며,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샀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마녀'라는 별명으로 이어진 이유입니다.

 

Q.헤티 그린의 투자 철학은 무엇이었나요?

A.그녀는 '쌀 때 사서, 비쌀 때 판다'는 원칙을 따랐습니다. 또한, 투기의 열기 속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며, 위기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뛰어난 안목을 보여주었습니다.

 

Q.헤티 그린은 어떻게 미국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나요?

A.그녀는 남들이 '쓰레기'라고 외면하는 미국 지폐(그린백)를 사들여, 미국 정부의 신뢰 회복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1907년 금융 위기 당시 뉴욕시에 거액을 대출해주며, 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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